2021. 1. 19. 10:37ㆍHistory (역사)
청동기 시대(B.C. 2000년~) : ①청동기와 민무늬 토기 등, ②(보리·콩 등 밭농사 중심 하에서) 벼농사의 시작, ③직사각형·장방형의 지상화 움집, ④기타(고인돌·바위그림·선민사상 등)
❑ 군장 사회(君長社會) : (신석기 시대에 시작된) 농경이 청동기 시대에 들어 더욱 발달함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나타나고, 그것은 평등한 부족사회에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생기도록 하여(➫사유재산과 계급의 발생) 정치적 지도자인 군장이 출현하게 된다.
※ 원시공동체사회(原始共同體社會) → 군장 사회(君長社會) → 고대국가
✅정치적 지도자인 군장이 출현하면서 국가가 형성되고(➫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), 이어서 철기 시대가 전개되었다.
※ 고조선은 「우리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」로,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하였다.
✅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남성은 바깥일(fe.농사나 전쟁)에 종사하고, 여성은 주로 집안일을 담당하면서 남성 우위의 사회(➫부계 중심의 사회)로 이행하게 되었다.
✅부족을 통솔하는 군장은 청동제 무기를 이용하여 이웃부족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다. 「방어를 위해 마을주변에 환호(도랑)를 두르고 목책(울타리)을 세운 청동기 시대의 마을 유적」을 통해 이러한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다.
청동기와 민무늬 토기 등
✔청동기 : 청동으로 만든 무기나 장신구로, 청동기 시대 및 철기 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다. ①무기로 비파형 또는 세형 동검 등이 있고, ②장신구로 거친무늬 또는 잔무늬 거울 등이 있다.
♦청동기 시대에 실제로 청동기가 일상생활에서 널리 이용었다고 보기 어렵다. 청동의 원재료인 구리와 주석은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를 가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. 게다가 청동기는 충격에 약하여 잘 부러졌다.
※ 즉, 청동기는 귀하고 다루기 어려우며 잘 부러지기 때문에 농기구나 일상적인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(➫농사를 짓거나 일상적인 활동에는 주로 '나무나 간석기'가 이용됨), 주로 지배층의 무기·장신구(꾸미개) 또는 종교적 의기(지배자의 상징물)로 사용하였다.
♦비파형 동검(요령식 동검)과 거친무늬 거울(조문경)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, 만주와 한반도(부여 송국리 등)에 걸쳐 분포한다. 이는 청동기 시대에 만주와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.
♦세형 동검(한국식 동검)과 잔무늬 거울(세문경) 등은 청동기 시대 후기에 만들어져서 철기 시대까지 사용된 청동기로, 주로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서 발견된다. 이는 우리나라에서 청동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.
※ 세형 동검은 (무기가 아니라) 의식용 도구였다.
♦청동기 시대에는 전문적인 청동기 제작 장인(➫금속을 다루는 전문장인)이 나타나는 등 직업적인 전문화도 이루어졌다.
❑ 거푸집(mould, 鎔范, 용범) : 금속을 녹여 부어서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로, 주로 청동기나 철기 등 금속도구의 제작에 쓰인다.
✔민무늬 토기 등
❑ 청동기 시대의 토기 : 덧띄 새김무늬 토기 → 민무늬 토기 → 미송리식 토기 → 부여 송국리식 토기 → 붉은 간 토기
✅덧띄 새김무늬 토기 : 토기의 입구에 점토 띠를 덧붙여서 그곳에 무늬를 새긴 토기로,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 초기까지 사용되었다.
✅민무늬 토기(무문토기, 無文土器) :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, 일본의 야요이 토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.
✅미송리식 토기 : 무문토기의 한 형식으로, 손잡이와 집선무늬가 특징이다.
✅부여 송국리식 토기
✅붉은 간 토기
(보리·콩 등 밭농사 중심 하에서) 벼농사의 시작
✔청동기 시대의 농업은 보리·콩 등 밭농사가 중심이었다. 다만, 일부 저습지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.
✔부여 송국리, 여주 흔암리, 서천 화금리, 평양 남경 등에서 탄화된 볍씨가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에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.
직사각형·장방형의 지상화 움집
✔청동기 시대의 움집은
①직사각형 또는 장방형으로 바뀌면서 점차 지상가옥화되어 갔다.
주의>완전한 지상식 주거는 철기시대에 등장하였다. 철기시대에 기존의 움집은 (지상식 주거가 점차 늘어나면서) 창고 등의 저장시설로 이용되었다.
②(취사와 난방을 위한) 화덕이 한쪽 벽으로 이동하고, 저장구덩이 한쪽 벽면 밖으로 돌출되거나, 집 밖에 따로 설치되었다. 창고 등의 저장시설이 집 밖에 독립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.
③4~5명 정도의 한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.
✔신석기 시대의 주거지는 주로 강가·해안가에 있었으며,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는 주로 배산임수의 구릉지에 있었다.
✔청동기 시대에는 주거용 외에 창고·공동작업장·집회소·공동의식장소 등도 만들어져서 정착생활의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.
✔(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취락유적인) 부여 송국리 등에서 발견된 환호유적은 청동기 시대에 부족 간 전쟁이 빈번하던 사회상을 짐작하게 한다.
❑ 환호유적 : 마을 주위(취락 주위)에 방어를 위해 도랑을 파고 목책(울타리)를 세운 유적으로, 부여 송국리 등에서 발견된다.
기타(고인돌·바위그림·선민사상 등)
✔고인돌(지석묘) :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, 북방식(탁자), 남방식(바둑판), 개석식이 있다.
♦고인돌은 전국에 분포하지만, 황해도·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다. 특히, 강화·화순·고창의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.
♦수십 톤에 달하는 고인돌의 제작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청동기 시대에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군장(족장) 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.
♦청동기 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고인돌(지석묘), 돌널무덤(석관묘), 돌무지무덤(적석총)이 있다.
※ 철기 시대의 무덤양식으로는 독무덤(옹관묘), 널무덤(목관묘)이 있다.
✔바위그림(암각화·암각·암화) : 바위나 동굴 내 벽면 등의 표면에 동식물이나 문양·기호 등을 그려 넣은 것으로, 울산 반구대, 울주 천전리, 고령 양전동 등이 유명하다.
※ 바위그림은 구석기 시대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,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것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.
♦울산 반구대의 바위그림 : 사슴·고래·거북 등 다양한 동물이 새겨져 있다. 사냥과 물고기잡이의 성공과 풍성한 수확을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.
♦울주 천전리의 바위그림 : 동심원 등 기하학적 무늬뿐만 아니라 사슴·물고기·새 등 동물도 새겨져 있다.
♦고령 양전리의 바위그림 : 동심원과 방패 모양 등이 새겨져 있다.
✔선민사상 : 하늘의 자손 또는 하느님에게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미로, 청동기 시대에 형성되었다.
※ 청동기 시대에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이 우세한 부족들은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는 선민사상을 가지고, 주변의 약한 부족을 통합·정복하고 공납을 요구하였다.
※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목적으로 내려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.(단군 건국 신화 중의 선민사상)
토우(土偶) : 흙으로 만든 사람, 동물, 생활용구 등의 형상으로, (완구용도 있지만) 대부분은 주술적이거나 부장물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.
※ 토우는 유럽에서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신석기 시대에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만들어졌다.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만들어져서 삼국시대의 신라와 가야에서 많이 출토되었다.
'History (역사)' 카테고리의 다른 글
신석기 시대(B.C. 8000년~) (0) | 2021.01.04 |
---|---|
구석기 시대(70만년 전 ~ 1만년 전) (0) | 2020.12.25 |
사료(史料) 비판 (0) | 2020.12.16 |
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 (0) | 2020.12.12 |